서적의 교열, 원수(怨讎)를 대하듯이…
서적의 교열, 원수(怨讎)를 대하듯이…
  • 전기저널
  • 승인 201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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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나 작가는 논문을 작성하거나 저역서를 집필하는 것이 본업일 것이다. 이들은 논문이나 저역서를 탈고했을 때에는 일정한 성취감이나 자기만족감을 느끼는 희열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도 잠시, 다음 과정은 오탈자에 대한 수정은 물론이고 작성한 내용을 첨삭하는 등 편집과 교열을 위하여 일정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작성한 원고를 가다듬는다. 이와 같이 문장의 집필에서 편집과 교열 과정을 마쳐야만 비로소 문세(問世)하는 서적이 탄생하게 된다. 이 과정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며 집필할 때와 같이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편집과 교열이 전문화된 각 분야에서 일련의 출판과정을 거쳐 대량의 서적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의 홍수’ 시대인 오늘날, 고적(古籍)들을 읽으면서
문득 과거에는 서적이 완성되기 전까지 어떻게 편집과 교열을 했는지 궁금했다. 종이와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시기의 서적은 죽간이나 목간에 베껴 써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글자가 빠지기도 하고 잘못 쓰기도 하고 더욱이 죽간을 차례대로 엮지 않으면 앞뒤의 내용이 뒤 바뀌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들여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 따라서 서적을 정리하고 문자를 교감(校勘)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이 일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기구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전문 기구와 이를 담당한 관리의 모습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확인할 수 있다. 중국 고대 시기의 한(漢)나라에서는 수집한 서적은 모두 궁정의 동관(東觀)이란 곳에 보관하였다. 국가에서 보관하는 서적은 소중히 보관한 서적[비적秘籍]이란 의미에서 비서(秘書)라고도 불렀다. 한대(漢代)의 비서감(秘書監)은 바로 국가의 도서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던 기구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규장각이나 존경각 등의 기관역시 이러한 기능을 담당한 국가 기구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교열(校閱)’작업에 해당하는 문자의 교감은 옛날에는 ‘수서(讎書)’라고 칭하여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업무였다. 한대의 대학자인 유향(劉向)은 그의 저서 《별록(別錄)》에서 서적의 교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책을 교정하는 것은 두 권의 책을 한사람은 자세히 보고[觀] 다른 한 사람은 소리내어 읽는데[讀] 서로 보기를 원수 집안 보듯이 하였다. 그러므로 ‘수서(讎書)’라고 말한다.” ‘수(讎)’의 의미는 ‘짝하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적대적 관계[讎]의 의미도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이 대교(對校)할 때에는 마치 원수 집안끼리 싸우기 직전의 상황처럼 잠시라도 늦출 수 없는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 호남성 장사시 근교의 금분령(金盆嶺)에서 서진(西晋 265-317)시기의 서적을 마주하고 있는 도용(陶俑)이 발견되었다. 두 명의 관리가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다. 한 명은 한 손으로는 책[牘]을 들고 읽으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여러 권의 책을 들고 있다. 다른 한 명은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붓을 들고 있는 형태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책상과 그 위에 놓인 교열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서적이 있을 뿐이다. 이 도용은 1천 년전 서적 교열의 실제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유향의 언급한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서적의 교열[수서(讎書)]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며 막중한 책임감이 수반되는 과정이다. 당나라의 시인이자 문학가인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자신의 체험을 기초로 지은 시(詩)《집현원옥예(集賢院玉蕊)》에서 집현원내에 있는 꽃인 옥예가 피고지는 것 조차 모를 정도로 편집에 집중해야 하는 고난함에 비유하여 교열의 직무가 매우 고통스러운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교열은 예부터 매우 지난한 작업이었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커다란 호사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세밀한 교감과 오류가 없는 서적에 대해서는 진본(珍本)이라 여겨 이를 구하고자 했다. 북송시대 저명한 학자인 송민구(宋敏求)의 집에는 서적이 3만 여권이 있었다. 그가 소장한 책은 평균 3~5차례의 교감을 거친 책이지만, 그는 책의 오류에 대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항상 “서적의 교열은 먼지를 청소하는 것과 같다. 쓸고 닦아도 나온다(校書如掃尘, 隨掃隨有)” 라고 하였다. 그는 하북(河北) 조주(趙州)의 춘명방(春明方)이란 곳에서 살았는데 당시 독서를 좋아하는 사대부들은 모두 이곳에 와서 송민구의 장서를 빌렸다고 한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비교적 편하게 책을 빌려보기 위하여 많은 방값을 지불하고 송민구 집 부근에 거주하자 방값이 올라 다른 지역보다 항상 1배 이상 비쌌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좋은 서적을 중시하는 모습임과 동시에 학술을 연마하여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학문하는 자세의 근본인 것이다. 과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저술과 그 후속 작업인 교열 편집은 모두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교열은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 글자 한 글자를 기계적으로 대조하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글자만을 알면 된다.” 그러나 이는 교열 작업의 진정성을 왜곡하는 것으로 이 일에 대한 가치를 지나치게 경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글자 한 문장을 교열하는 것은 전문적인 지식과 문화적 소양 뿐만 아니라 책임감이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수서(讎書)’를 ‘교수(校讎)’라고도 하였다. 하나의 잘못된 글자를 뽑아내는[校] 것을 적인(敵人) 한 명을 사로잡는 것과 동일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의 중턱에서 필자는 출판사를 운영하는 후배에게서 “마지막 교열입니다. 휴가 다녀온 뒤 출간할께요.” 라는 내용의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이런 저런 일들에 밀려 ‘원수’ 보듯이 원고를 검토하지도 못한 글을 정말로 정성을 다해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준 것이다. 매 순간 긴장감을 갖고 대해야 할 서적을 업적 산출이라는 ‘현실’에 밀려 단순 생산의 대상으로 인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과연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전통시대 문인들의 서적에 대한 진실된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서적에 대한 자세는 어떤지 새삼 반추해 볼 시점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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